
장애인 삶의 강력한 힘이 되어 둘 수 있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
사) 해냄복지회 이사장
김재익 철학 석사
나는 뇌성마비를 갖고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내 삶은 남들과 확연히 달랐다. 남들이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친구를 사귀며 미래를 준비할 때, 나는 세상의 가장자리나 골방에서 내 몸의 한계와 사회의 냉혹한 시선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은 어느 순간 하나의 사상, 하나의 문장, 하나의 깨달음으로 방향을 바꿀 때가 가끔 있다. 내게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바로 그러한 사상이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단순히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한계를 넘어 더 높은 삶으로 나아가려는 근원적 힘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장애인 삶의 ‘끝’이 아니라 다시 해석해야 할 삶의 조건으로 바라보게 하는 사상적 계기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때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조건을 해석하고, 그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정신까지 굴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고 해서 배움의 길이 영원히 닫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서 살기가 어렵다고 해서 삶 전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사상을 만난 뒤, 내 삶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불가능의 존재로만 보지 않으려 했다. 늦었지만 배움을 향해 다시 나아갔다.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철학을 공부하며 인간과 삶, 고통과 존엄, 자유와 책임의 문제를 붙들었다. 이후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다시 재활학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단법인 해냄복지회의 이사장으로서 장애인의 삶과 권리, 자립생활과 사회참여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다. 어릴 때 만난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내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나에게 단순한 철학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진 내 삶을 다시 세우게 한 내면의 기둥이었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도록 붙든 정신의 힘이었다. 장애를 부끄러움으로만 보지 않고, 오히려 인간 존재의 깊이를 묻게 하는 조건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 전환의 사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장애인은 교육에서 밀려나고, 노동에서 배제되고, 이동과 의사소통에서 장벽을 만나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편견과 차별을 경험한다. 장애가 개인의 불편을 넘어 사회적 배제의 구조로 작동하는 현실은 아직도 견고하다. 많은 장애인이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을 너무 일찍 배운다. 그리고 그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목소리처럼 굳어져 버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장애인의 삶과 깊게 만난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위로나 동정이 아니다. 물론 제도적 지원, 복지서비스, 교육권, 노동권, 이동권, 의사소통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장애인 스스로 자기 삶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상적 힘도 필요하다. 장애를 이유로 자기 존재를 낮추지 않는 힘, 사회의 편견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힘, 주어진 한계 안에서도 새로운 삶의 길을 세우는 힘이 필요하다.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는 바로 그 힘이다. 그것은 “무조건 참고 견디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너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은 “장애가 있으니 조용히 살아가라”는 명령에 맞서, “장애가 있어도 나는 내 삶의 의미를 스스로 세우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남과 똑같아지려는 힘이 아니라, 자기 조건 속에서 자기만의 존엄을 세우는 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애 극복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장애인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교육의 부재, 사회적 차별, 물리적 장벽, 고용시장의 배제, 복지제도의 한계, 장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장애인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개인에게만 요구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회 전체를 향한 가치전환의 요구로 확장되어야 한다.
장애인을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사회에서, 권리의 주체로 보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사회에서, 자기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시민으로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장애인을 생산성이 낮은 존재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장애인의 삶에 필요한 사회적 ‘힘에의 의지’다.
장애인의 ‘힘에의 의지’는 세 가지 방향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첫째, 자기인식의 전환이다. 장애인은 자기 삶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 장애는 삶의 전부가 아니라 삶의 조건 중 하나다. 그 조건이 어렵고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존엄 전체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둘째, 배움과 성장의 의지다. 나 역시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검정고시를 통해 배움의 길로 들어섰다. 배움은 나이와 조건을 넘어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장애인에게 교육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자기 삶을 다시 해석하는 해방의 과정이다.
셋째, 사회참여의 의지다. 장애인은 골방 안에 머물러야 할 존재가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말하고, 결정하고, 연대해야 한다. 장애인의 삶이 사회 속으로 나올 때, 사회도 비로소 인간의 다양성과 존엄을 배우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내 삶을 통해 말하고 싶다. 장애인은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장애인은 자기 삶의 의미를 새롭게 세울 수 있는 존재다. 장애인은 사회가 정해놓은 좁은 기준안에 갇힐 필요가 없다. 설령 출발선이 달랐고, 길이 막혔고, 몸이 자유롭지 못했더라도 인간의 정신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 정신이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을 때, 장애인의 삶은 새로운 가능성의 길을 연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내게 “살아남으라”가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라”고 말했다.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라”가 아니라 “그 운명을 다시 해석하라”고 말했다. “너는 부족하다”가 아니라 “너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사상이 오늘의 장애인들에게도 하나의 힘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게 수없이 많은 장벽을 세워놓았더라도, 장애인 스스로 자기 존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장애인의 삶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존엄의 현장이다. 장애인의 삶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을 세울 수 있는 인간 실존의 자리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살아왔지만, 그 장애가 내 삶의 마지막 문장은 아니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만난 뒤, 나는 내 삶의 문장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철학을 공부했고, 대학원 철학 석사를 마쳤으며, 재활학 박사가 되었고, 지금은 장애인의 권리와 자립생활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적 성공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장애인의 삶 속에서도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될 때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장애인의 삶은 끝난 삶이 아니다. 장애인의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삶이다. 그 시작은 제도와 사회의 변화에서 오고, 동시에 자기 안의 무력감을 거부하는 내면의 결단에서 온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바로 그 결단을 가능하게 하는 사상이다.
이제 우리 장애인들도 자기 삶을 향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
나는 사회가 부여한 무능의 이름을 거부하겠다.
나는 장애를 이유로 내 삶의 가능성을 닫지 않겠다.
나는 내 조건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세우겠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장애 인식까지 바꾸어 나가겠다.
이것이 장애인의 삶과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만나는 자리다. 그것은 고통을 미화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가장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현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인간 존엄의 선언이다. 장애인의 삶은 허무에 의해 끝나지 않는다. 자기 삶을 다시 세우려는 ‘힘에의 의지’ 속에서, 장애인의 삶은 더 깊고 강한 가치로 다시 태어난다.

